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 코헨 (문단 편집) == 최후 ==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연전연패에 이가 갈리던 시리아는 혹시나 하여 자국 내 인사들의 뒷조사를 면밀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코헨이 보내던 무선통신이 결국 들키고 만다.[*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이미 이 이전부터 시리아 내에서 승승장구하며 입지를 다지던 엘리 코헨의 긴장이 풀어져서 공작용 통신망 등을 '내 딸에게 생일 축하 메세지를 전해달라'는 식으로 사적으로 쓰거나 비화하지 않고 쓰는 등 싹수가 노래졌고 모사드 역시 일찍부터 이를 감지하고 엘리 코헨을 복귀시킬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가 그간 그가 세운 공적과 그가 보내온 정보의 가치를 감안해 좀 더 두고보자는 결론을 내었던 것. 그러다 결국 사달이 났다.] [[1965년]] 1월, 시리아는 [[소련]]의 기술협조로 결국 그를 잡았는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 코헨은 [[국방차관]]까지 오른 최고위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거저 저런 고위직에 오른 건 아니다. 위에 나온대로 엄청난 부자로 행세하면서 막대한 돈을 시리아 군, 정계에 풀면서 승진한 것으로, 유태인들의 막대한 자금력으로, 바꿔 말하면 돈만 있으면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시리아 정계가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리아 군·정계는 난리가 났다. 국방차관이 알고보니 이스라엘의 스파이라는 게 드러났으니 코헨과 친했던 시리아 군·정계 인사들까지 면밀조사가 이뤄졌는데, 당시 시리아 국방장관이던 [[하페즈 알 아사드]][* 1930 ~ 2000. 1970년 무혈 [[쿠데타]]를 벌여 시리아 독재자가 된 인물이자 시리아 독재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의 아버지다.]도 차관인 코헨과 얽히면서 하마터면 숙청당할 뻔했다. 결국 연루된게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그는 이스라엘군을 교란시킬 거짓 정보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평소와 다른 리듬으로 이스라엘 측에 무선을 보냈기에 이스라엘 측에서는 엘리 코헨이 발각되었음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사형이 확정 되고 당시 중동에서 정치 및 종교범의 인권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그냥 사형도 아니고 본보기로 5월 18일 수만여 시리아 군중 앞에서 야유 속에 다마스쿠스에 있는 마르제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3/Eli_Cohen.jpg|교수형된 사진]] 이스라엘은 그를 구하고자 막대한 돈을 준다느니, 시리아 [[스파이]] 10명과 교환하자느니, 별별 제의를 하며 매달렸지만 거절당했다. [[미국]]이나 [[프랑스]]도 중재를 나섰으나 그동안 아랍 스파이에 대하여 미국이나 프랑스가 나선 적 있냐는 아랍권의 비아냥과 조롱만 받았다. 미국은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에게 그를 하다못해 무기징역으로라도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으나, 친미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조차 불가능하다고 매몰차게 거부했다. 워낙 간첩 행위의 스케일이 커서 별 수가 없다는 이유. [[모사드]] 요원이던 아우 모리스 코헨(1927~2006)이나 1959년에 결혼한 그의 아내인 나디아 마잘드 코헨은 그저 TV로 생중계되는 교수형 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시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만 시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자체 매장을 해버렸다. 그에게는 2남 1녀 자식들이 있었는데 장녀 소피, 장남 이리트, 둘째 샤이 코헨이 있었지만 다들 어릴적에 아버지를 봐서 기억도 하지 못한다고. 소피조차도 아버지가 죽을때 4살이었고 샤이는 채 1살도 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